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코틀랜드 왕국 (문단 편집) === 중세 === 쇼러스 보허넌과 같은 역사가들은 9세기 중반의 왕인 기리크를 대왕이라고 부르며 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유는 기리크에 대한 기록이 잉글랜드 쪽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치세기가 동시대 잉글랜드에선 [[이교도 대군세]]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것은 스코트인이 아니라 데인족 [[바이킹]]이었다. 11세기 중반 스코틀랜드는 [[브리튼인]] 왕국이었던 어스트라드클리드[* Ystrad Clud. 로마가 멸망하고 형성되기 시작한 브리튼족의 왕국으로, 현재 컴브리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를 합병했다. 11세기 후반에 찬탈자 [[막 베하드]]를 무찌르고 왕위에 오른 [[맬컴 3세]]는 1068년 [[윌리엄 1세]]에게 쫒겨온 [[참회왕 에드워드]]의 친척인 [[에드거 애설링]] 왕자 일가를 환대했고 그의 여동생인 마가렛과 결혼했다. 이후 맬컴은 [[브리튼 섬]]의 통일을 바라면서 군대를 보내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 많은 포로들과 함께 귀환했다.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앵글로 색슨족 거주자가 늘어 [[영어]]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입된 영어가 훗날의 [[스코트어]]가 된다.] 노르만 인도 스코틀랜드로 이주해 군대의 주력을 맡았고 현재까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도 대부분 노르만 혈통을 지니게 되었다. 맬컴 캔모어는 이전까지는 잉글랜드로 간주되던 포스 만의 안토니누스 성벽을 넘어 에든버러까지 진출했고 그곳에 성을 쌓아 이후에 스코틀랜드의 궁정으로 삼았다. 윌리엄 2세와의 전쟁에서도 스코틀랜드는 승패를 주고받으며 대등한 모습을 보였다. 로디언이 이때 강역에 포함되었고 노섬벌랜드까지 위협했다. 하지만 1093년 맬컴 3세가 대군을 이끌고 보더스 지방의 요새 앤윅을 공격했을 때 노르만 귀족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군대에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본인도 장남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맬컴의 어린 아들들인 에드거, 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 1세가 차례로 즉위했다. 데이비드 1세는 천한 출신인 사람의 호소도 경청해 주는 군주였고 억울한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주교구들을 설립해 교회의 찬사를 받았고 재산을 기부해 홀리루드 수도원, 멜로즈 수도원, 드리버러 수도원, 뉴배틀 수도원, 캠버스케네스 수도원, 제드버러 수도원 등의 수도원들을 건립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죽고 나서 벌어진 [[모드 황후|마틸다]]와 [[스티븐 왕|스티븐]] 간의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데이비드 1세는 대군을 소집해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깃발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다만 이어진 스티븐과의 협상에서 스코틀랜드는 뉴캐슬과 뱀버러의 요새를 제외한 노섬벌랜드, 더럼 지역을 할양받아 영토를 확장했다. 데이비드 1세는 1153년에 사망했고 죽고 나서는 성 데이비드로 추존되었다. 그의 장남인 '관대한 헨리'는 1150년에 요절했고 손자인 맬컴이 즉위했다. 맬컴 4세는 기질이 온순하고 상냥하다고 해서 소녀왕이라 불렸는데 잉글랜드 왕의 가신으로서 점령지들을 통치했고 일부는 반환하기까지 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그를 따라 프랑스에서 지원군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에 있던 그에게 탄원서를 보내 잉글랜드에 의한 지배를 거부했고 맬컴 4세는 에든버러로 돌아와 귀족들과 협의해 관계를 다시 청산했다. 그는 1165년에 제드버러에서 사망했고 12월 24일에 그의 동생인 윌리엄이 즉위해 1174년에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다시 대립을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